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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낙산사(洛山寺) 소실 전 후사진

by 천연 (오 자섭) 2011. 2. 9.
 낙산사(洛山寺) 소실 전 후사진
 
한국불교사에서 관음보살 신앙의 본향이자 관동팔경의 하나로 불교신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유서 깊은 사찰인 낙산사가 강원 양양과 고성일대를 덮친 산불로 인하여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전소 되었다고 합니다. 정부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할 당시처럼 복구를 계획하고 있지만, 녹아내린 동종과 숯이 되어 버린 목조건물들을 다시 복 원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아무쪼록 예전모습으로 다시 재건되기를 기원 합니다.
0001 ▲ 낙산사(洛山寺)(홍예문)[1]
위치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오봉산 소개 :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해변에 있는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로서, 한국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 나이다. 낙산은 산스크리트 보타락가(補陀洛伽)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다. 671년 의상(義湘)이 창건하였고, 고려 초기에 산불 로 소실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그 뒤 몽골의 침략으로 전소되었다. 전소된 뒤 몇 차례 중창·중건되었다가 6·25 때 다시 전소된 것을 1953년 일부 복구하였고, 76년 원철(成徹)이 중 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보전·종각·일주문·천왕문·선 실·승당·객실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낙산사동종(보물 제479호)·낙산사칠층석탑(보물 제499호)·낙산 사홍예문(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낙산사원장(洛山寺垣檣;강원도유형문 화재 제34호)·양양낙산사사리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75호) 등이 있다. - 특징 : 석가모니불이 아닌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어 본전을 대웅전이라 하지 않고, 원통보전이라고 함786년 처음 화재로 소실된 이래 한국전쟁 때 까지 산불 등으로 9차례의 화재를 만난 비운의 사찰...
0002 ▲ 낙산사(洛山寺)(원통보존)[2]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원통보전을 포함한 절 일원이 현재 강원도유형 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53년에 복구된 것이지만, 예로부터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주요 전각인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서 보듯이 신라시대 의 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 받은 뒤 관 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 는데,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 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開山祖)인 범일(梵日, 810∼889)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 (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 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고려의 명유(名儒)인 이규보 등이 새롭게 관음상의 복장을 조성하기도 했 으니, 역시 원통전이 주요 봉안 전각이었을 듯하다 원통보전 내에는 건칠 관세음보살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고, 2003년 2월 3일 보물 제 1362호로 지정되었고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도 가 걸렸다. 그밖에 관음상 주위로는 오른쪽에 신중탱화(1959년)와 동종 (銅鐘), 사진본으로 된 의상대사 진영 등 근년에 조성된 성보가 있다.
0003 ▲ 낙산사(洛山寺)[3]
보타전은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요 우리 나라의 대표적 관음도량임을 상징하는 전각으로서, 1991년 7월 짓기 시작해서 1993년 4월 10일에 완공했다. 규모는 앞면5칸, 옆면3칸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안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성관음(聖觀音)·십 일면관음(十一面觀音)·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마두관음(馬頭觀音)·준제 관음(准堤觀音)·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상과 32응신상 천오백관음상이 봉 안되어 있다. 앞면 중앙에 천수관음을 비롯해서 좌우로 6관음, 그리고 뒤쪽으로 천오백 관음상이 있다. 천수관음은 입상이며, 나머지 6관음은 좌상이다. 낙산사 천수관음은 32관음신상으로도 불려지는데, 그 뒤쪽으로는 목각 후불탱이 조성되었다. 보타전 안에는 그밖에 동종과 금고(金鼓)가 있다. 전각 외부 벽화는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0004 ▲ 낙산사(洛山寺)(해수관음상)[4]
낙산사 성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이 해수관음상 (海水觀音像)이다. 그래서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동해에 왔다가 낙 산사를 찾는 여행객들이면 빠짐없이 들러 참배하는 것이 하나의 정해 진 코스가 되어 있을 정도다. 1972년 처음 착공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했다. 크기는 높이 16m, 둘레 3.3m, 최대 너비 6m이며, 대좌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에는 사천왕상(四川王像)을 조각했다. 관음상은 대좌 위에 활짝 핀 연 꽃 위에 서 있는데, 왼손으로 감로수병(甘露水甁)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께에서 들어 수인 (手印)을 짓고 있다. 이 해수관음상은 우리 나라에서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손꼽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약700여 톤을 운반해와 조성한 것이다. 해수관음 상 앞에는 기도처인 관음전이 있다.
0005 ▲ 낙산사(洛山寺)(보타전 내 관음상)[5]
1993년에 완성된 보타전 안에는 한국에선 처음으로 천수관음(32관음신상)· 성관음·십일면관음·여의륜관음·마두관음·준제관음·불공견색관음 등 7관음을 봉안했다. 그리고 그 뒤에 1500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관음신앙의 성지답게 그야말로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셈이다. 이렇듯 많은 관음상을 조성한 것은 우리 민족의 구제와 해탈을 기원하는 뜻에서라고 한다. 1500관음상 한 분 한 분의 천수천안과 32응신상을 곱하 면 그 수가 5천만 정도인데, 그것은 곧 5천만 우리 민족의 인구 수와 일치 한다. 곧 우리 5천만 민족의 구원과 해탈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관음 상의 재질은 모두 목조로서 백두산에서 자라는 홍송(紅松)이다. 한편 7관 음상을 봉안하던 날의 이적(異蹟)이 전해져 눈길을 끈다. 그날 밤에 하늘 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청학(靑鶴) 다섯 마리가 허공을 날아 올랐고 그 때 늘 거친 파도소리를 토해 내던 동해 바다가 문득 조용해졌으며, 무지개와 같은 서기광명(瑞氣光明)이 온 하늘에 가득 찼다고 한다. 또한 그날 밤 신도회장은 동해 바닷물이 해일 을 일으켜 보타전까지 날아 오르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0006 ▲ 낙산사(洛山寺)(칠층석탑)[6]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조선시대 석탑으로서 현재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산사는 조선 세조 대 (재위,1455∼1468)에 중창되었는데 이 탑도 그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 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相輪)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 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평면은 방형(方形)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 고 그위에 상륜부가 마련된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석(基壇石)은 지면에 2 단의 층을 이룬 지복석(地覆石)과 그 위의 복련(伏蓮)이 조각된 지대석 (地臺石)으로 구성되었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우주(隅柱)가 새겨지지 않았고, 그 위에 얹은 뚜껑 돌인 갑석(甲石)은 아래 위가 수평인 하나의 돌로 된 판석(板石)인데, 그 밑에 부연(副椽)과 2단의 각형(角形) 고임이 있다. 기단 상면에는 겹잎〔複蓮〕의 복련(覆蓮) 24잎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 양식은 강릉시 내곡동 403번지에 있는 보물 제87호 신복사 (神福寺)터 삼층석탑과 비슷하여 신복사터 삼층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판단 하는데, 이것은 동해안 지역의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지니는 공통 양식 계 열에 속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탑은 한국전쟁 당시 손상되었으나 1953년 4월 이형근 장군이 낙산사를 중건할 때 함께 재건되었다. 현재 탑의 크기는 전체 높이 620㎝이다. 한편 이 탑은 본래 신라시대에 의상스님이 삼층으로 쌓았다가 조선시대에 세조 임금의 명을 받은 학열(學悅)스님이 9층으로 다시 쌓고 수정염주 (水精念珠)와 여의주(如意珠)를 봉안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본래는 상륜부 가 오동(烏銅)으로 장식되었으나, 1951년 1.4후퇴 때 없어졌고 지금 것은 그 이후에 새로 얹은 것이라고도 한다.
0007 ▲ 낙산사(洛山寺)(공중사리탑)[7]
해수관음상 앞에 있는 관음전 옆의 숲속 길로 들어가서 약 100미터 가량 내려가면 숲 속에 공중사리탑(空中舍利塔)이 있다. 현재 강원도유형문화 재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공중사리탑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 탑(浮屠塔)으로서, 조선시대 중기인 1692년(숙종 18)에 석겸(釋謙)스님 등이 대원(大願)을 발하여 세웠다고 전한다. 이 공중사리탑을 조성한 인연은, 1683년에 홍련암에서 도금불사를 거행할 때 문득 방안이 서기(瑞氣)로 가득 차더니 공중에서 영롱한 구슬이 탁자 위에 떨어졌다고 한다. 스님들이 그것을 들어보니 유리처럼 광채를 내었다. 스님들이 기뻐 말하기를 "이 같은 상서로움이 옛날에도 두 번이나 있었다 고 하는데, 지금까지 세 번째니 얼마나 반가운가."라고 말했다. 이에 석겸스님 등이 이 탑을 쌓고 그 구슬을 봉안했는데 그 공사가 무려 9 년이나 걸렸다. 그리고는 탑이 완성된 이듬해 수춘거사(壽春居士)라는 문 사(文士)를 초빙하여 그 유래를 탑비(塔碑)에 적었는데, 이 탑비는 현재 홍 련암 옆에 있다.
0008 ▲ 낙산사(洛山寺)(동종)[8]
원통보전에서 내려와 대성문을 나서서 왼쪽을 보면 고향당 옆 종각에 보물 제479호로 지정된 낙산사 동종(銅鐘)이 있다. 조선시대인 1469년(예종 1)에 낙산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세조를 위해 그의 아들인 예종이 만들게 한 범종이다. 이 범종의 양식을 보면, 종신(鍾身)은 중앙에 세 줄로 된 굵은 띠를 옆으로 돌려서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했다.보통의 범종에서는 띠 윗부분에 놓이는 유곽(乳廓)과 유두(乳頭)가 생략된 것이 특색이며, 그 자리에 보살상 4체를 양각했고, 그 사이에 범자(梵字) 네 글자씩을 역시 양각으로 배치했다. 보살상은 두광을 갖춘 채 연화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두광·보관(寶冠)· 천의(天衣) 등의 표현이 모두 유려한 솜씨로 되었습니다. 두광·보관(寶冠)· 천의(天衣)등의 표현이 모두 유려한 솜씨로 되어있다. 이 보살상 위와 종 뉴 바로 아래에 있는 어깨띠〔肩部〕 부분에는 또다시 범자 열 여섯 자를 양각으로 돌아가며 배치했으며, 이 범자 위로 연잎 서른여섯잎을 새겨넣었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범종 가 운데 16세기 이전에 조성된 드문 예 가운데 하나로서, 당대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크기는 전체 높이 158㎝, 입지름 98㎝이다.
0009 ▲ 낙산사(洛山寺)(원장)[9]
원통보전 주위에는 그 둘레를 네모 낳게 방형(方形)으로 둘러싸고 있는 조 선시대 초기의 담장인 원장(垣墻)이 있다. 축조된 시기는 세조가 절을 중 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이 원장은 법당을 둘러싼 성역(聖域) 공간 임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다.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 담장이며, 현재 강원도유 형문화재 제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장 안쪽의 담벽은 기와로 쌓고 담장 바깥쪽은 막돌로 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 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법당을 향한 담장 안쪽에는 밑부분에 2단의 장대석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1단의 장대석 받침돌을 놓았다. 담벽은 강회진흙과 평와(平瓦) 를 차례로 다져 쌓아 담벽앞면에 기와로 가로 세로의 줄을 맞추고,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둥근 화강암을 바르게 쌓고 돌과 돌 사이는 강화진흙으로 메웠다. 담장 위는 기와로 지붕을 이어 담벽을 보호 하고 있다. 본래 터만 남아 있 었으나 근래에 전체적으로 보수하면서 연결했다. 크기는 전체 길이 220m, 높이 3.7m이다 원통보전을 나와 조계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나가다보면 일 주문 못미쳐 무지개 모양의 석문(石門)인 홍예문(虹霓門)이 있다. 이 홍예문은 위는 누각(樓閣)이고 그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이룬다. 홍예 문은 1467년(세조 13)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그 위의 누각은 1963년 10 월에 지은 것이다. 축조 방식은 먼저 문의 기단부에 걸치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 를 앞 뒤 두 줄로 쌓아 둥근문을 만들었다. 선단석은 홍예문 등에 사용되 는 맨 밑을 괴는 모난 돌을 가리킨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과 같은 벽을 쌓아 사찰 경내 와 밖을 구분했다. 이 홍예문에는 장방형으로 26개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 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혹은 사용된 돌은 강현면 정암리 길가의 것을 가져다 쌓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0010 ▲ 낙산사(洛山寺)(홍예문)[10] 0011 ▲ 낙산사(洛山寺)(홍련암)[11]
낙산사의 산내암자의 홍련암(紅蓮庵)은 의상대 북쪽300m 지점에 있다. 이 홍련암은 의상대사가 본절인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장소로서, 또한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석굴 안에서 기도하던 바로 그 장소로서 낙산사의 모태가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에서부터 멀 리 이 곳까지 온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푸른 새〔靑鳥〕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므로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 를 했다. 이윽고 7일 후 바다 위에 붉은 연꽃, 곧 홍련이 솟아나더니 그 위에 관음 보살이 나타나 의상대사는 드디어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 자를 세우고 홍련암이라고 이름 짓고, 푸른 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 (觀音窟)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편 또다른 창건설화로서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리 에 대나무가 솟았는데, 그 곳에 불전(佛殿)을 지으니 곧 홍련암이라고도 전한다. 두 이야기 전부 의상대사가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려 관음보 살을 친견했다는 내용에서는 일치하며, 부분적으로 파랑새·대나무·석굴 등 이 첨가된 것이므로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홍련암의 연혁은 주로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에 의거해 살펴볼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창건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619년 (광해군 11)에 중건되었고, 1752년(영조 28)에 덕린(德麟)스님이 중수했다. 이어서 1797년(정조 21)에 혜민(惠旻)스님 중건, 그리고 1869년(고종 6)에 의연 (義演)스님이 중건했으며 1911년에 흥운(興雲)·청호(晴湖) 두 스님이 중 수했다고 한다. 1869년의 중건은 1866년의 홍수로 무너졌기 때문이며, 1911년의 중수는 1908년(융희 2)에 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연혁이 비 교적 짧고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연혁이 거의 전하지 않는 점이 아쉽지만, 남겨진 기록을 통해서나마 그런대로 낙산사와 더불어 꾸준히 법등을 이 어왔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가 있다. 전각이나 불 상·불화등에서 오래된 것은 없으나 홍련암 전체가 현재 강원도문화재자 료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에는 동암 도봉(東庵道峰)스님이 1962년에 중건한 봉향각(奉香閣)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관음전 등은 1975년의 중창 때 지어졌으며, 안에 봉안된 탱화 역시 같은 해에 조성되었다. 관음전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서 바닷가 암석굴(巖石窟)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전각은 법당 가운데쯤에 조그맣게 마루를 뚫어 놓아 그곳으로 출렁이 는 바닷물을 실감나게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이하다. 절 근처 바닷가 에는 보기 드문 석간수(石澗水)가 있는데, 이 샘은 원효스님이 양양에 있 는 영혈사(靈穴寺) 샘물을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 왔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 샘물은 지금은 보타전 앞으로 옮겨져 있다.
0012 ▲ 낙산사(洛山寺)(의상대)[12]
의상대(義湘臺)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전한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체조스님 의 활동년대가 18세기이므로 위의 시를 통하여 적어도 이 때까지는 의상 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근대 이전에 폐허가 되었던 듯하 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5년에 낙산사 주지 김만옹(金晩翁)스님이 이 곳 에 정자를 새로 지었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 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 고, 스님은 그 소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 곳을 의상대로 불러 왔으나 이 때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 이 붙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1974년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도 한 차례 중건되었다. 근래는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이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되었 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六角亭)으로 복원되었다. 이 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 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즉겨 찾는 곳이 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가져온 곳/감초 글쓴이 : 감초]
0013 ▲ 화마가 한 순간에 빼앗아 가 버린 낙산사(洛山寺)화제현장[13] 0014 ▲ 화마가 한 순간에 빼앗아 가 버린 낙산사(洛山寺)화제현장[14] 0015 ▲ 화마가 한 순간에 빼앗아 가 버린 낙산사(洛山寺)화제현장[15] 0016 ▲ 화마가 한 순간에 빼앗아 가 버린 낙산사(洛山寺)화제현장[16] 0017 ▲ 화마가 한 순간에 빼앗아 가 버린 낙산사(洛山寺)화제현장[17] 0018 ▲ 화마가 한 순간에 빼앗아 가 버린 낙산사(洛山寺)화제현장[18] 0019 ▲ 화마가 한 순간에 빼앗아 가 버린 낙산사(洛山寺)화제현장[19] 0020 ▲ 낙산사(洛山寺) 천년 만년 ...관음신앙의 성지![20] 0021 ▲ 낙산사(洛山寺)소실전[21] 0022 ▲ 낙산사(洛山寺)소실전[22] 0023 ▲ 낙산사(洛山寺)소실전[23] 0024 ▲ 낙산사(洛山寺)소실전[24] 0025 ▲ 낙산사(洛山寺)원통보전(소실)7층석탑(현존) 소실전[25] 0026 ▲ 낙산사(洛山寺) 원통보전(소실)7층석탑(현존) 소실전[26] 0027 ▲ 낙산사(洛山寺)소실전[27] 0028 ▲ 낙산사(洛山寺)소실전[28] 0029 ▲ 낙산사(洛山寺)소실전[29] 0030 ▲ 낙산사(洛山寺)소실전[30] 0031 ▲ 낙산사(洛山寺)소실전[31] 0032 ▲ 낙산사(洛山寺)소실전[32] 0033 ▲ 낙산사(洛山寺)(공중사리탑}(현존)[33] 0034 ▲ 낙산사(洛山寺) 소실전[34] 0035 ▲ 낙산사(洛山寺) 해수관세음보살님(현존)[35] 0036 ▲ 020 낙산사(洛山寺) 해수관세음보살님(현존)[36] 0037 ▲ 낙산사(洛山寺) (해수관세음보살님(현존))[37] 0038 ▲ 낙산사(洛山寺)(바다가 보이는 의상대(현존))[38] 0039 ▲ 낙산사(洛山寺)(홍련암(현존))[39] 0040 ▲ 낙산사(홍련암(현존)앞바다)[34] 출처 : 세상사 바로보기 | 글쓴이 : 증인
오전 8:33 2007-06-29(금) “오동나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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