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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만봉 스님의 삶 그리고 작품세계

by 천연 (오 자섭) 2011. 2. 9.
 "불화 속에 팔만사천법문이 고스란히"
만봉 스님의 삶 그리고 작품세계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난 스님은 6세 때부터 김예운 스님 아래서 
불화를 배운 뒤 26년 봉원사로 출가해 금어(金魚) 자격을 따냈다. 
금어란 불화 그리기의 최고 경지에 이른 스님에게 주는 칭호다.
0208 ▲ 불화의 금어(金魚)인 만봉스님

72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보유자로 인정된 스님은 
같은해 태고종 서울 종교원장에 이어 75년에는 태고종 봉원사 
주지를 역임하기도 했다. 
만봉 스님의 첫 전시는 1978년 제12회 세계불교도 우의회 
동경총회장에서 기념전 형태로 열렸다. 
또한 같은해 명동유네스코 회관에서는 일본 전시 귀국작품전을 
개최했다. 이후 81년 전통공예관(경복궁) 특별기획전에 이어 
91년 일본 순회전, 97년 대구지역 순회전, 99년 부산지역 순회전, 
2000년 분당전, 2002년 서울 관훈동 백악예원전, 2005년 서울중
요무형문화재전수관 기회전 등 다수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렇게 만봉 스님은 국내외에서 한국 불교 미술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으며 그 공로로 1988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만봉 이치호 단청전 작품집>이 있다.
▲ 만봉 스님의 삶과 작품세계
만봉 스님은 6세 때 불가에 들어가 김예운 스님에게서 불교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이래 입적에 드는 순간까지 90여년 동안 한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말 그대로 영원한 ‘현역’이었다. 특히 지난 4월말에는 
서울 신촌 봉원사 대웅전 단청과 개금불사를 완성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0209 ▲ 만봉스님 31세시절 금강산 계곡에서 도반 스님과

만봉 스님의 평생의 화두였던 불화 그리기는 9,000여장의 혹독한 
그림 수업을 거쳐 18세 때 일궈낸 ‘금어(金漁)’ 칭호를 받으면서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만봉 스님은 금어가 된 이후 화구를 꾸려 금
강산, 묘향산, 지리산 등 명산대찰을 누비면서 단청불사에 매진했다. 
수많은 만봉 스님의 단청과 불화에 섬세함과 생동감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것은 스님의 작업 과정에 있었다고 불교미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스님은 단청 가칠, 골채, 바름질 등 10여개 이상의 단청 
과정 하나 하나를 거칠때마다 강한 집중력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다. 
스님은 평소 제자들에게 스님은 “단청과 불화는 여러 과정을 이론과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씩 손끝으로 익혀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고 강조했다.
0210 ▲ 온종일 탱화작업에 몰두하고있는 만봉스님

만봉 스님은 97세로 열반에 들기까지도 하루 온종일 탱화작업에 
몰두한 이 시대 불교미술의 장인이요 거장이었다. 특히 노환에도 
불구하고 탱화 작업을 할때면 손 떨림 하나 없이 작업에 몰두했다.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숨을 고르면서 보여주는 스님의 붓놀림이 
섬세하면서 예사롭지 않았다고 제자들은 회고한다. 스님은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내리 두 시간은 ‘초인적’으로 몰두 했다.
간혹 제자들의 질문이 날아들면 하던 작업을 멈추고 몸소 시연까지 
보여주며 직접 지도 해줬다. 꼼꼼하게 제자들의 미진한 점들을 
지적하는 스님은 자못 엄했다.
0211 ▲ 초인적 으로 몰두하고 있는 만봉스님

입적에 들때까지 스님을 곁에서 시봉한 단청장 전수조교 인섭 스님은 
“만봉 스님은 부처님 그리는 일은 여러 장 그린다고 되는 게 아니고 
수천 장씩 그려야 된다”며 수행이라 생각하고 매진할 것을 항상 
강조했다고 회고한다.
이런 수행 원력과 열정으로 가득한 스님의 붓끝을 거쳐 이 시방세계에 
탄생된 불보살은 수없이 많다. 70여년동안 남북한 사찰에 두루 걸쳐 
‘전설’처럼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 북한 금강산의 표훈사와 유점사, 장안사, 마연사의 
단청을 도맡았고, 서울 도봉산 도선사, 안동 봉정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서울 봉원사 등 주요 사찰과 경복궁 경회루를 비롯해 
종로 보신각 숭례문(남대문) 남한산성 등 문화재 단청도 그렸다.
0212 ▲ 1999년 태고사 명부전 시왕상에 점안을 하고 있는 만봉 스님

임영주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은 “평생을 전통불화와 탱화제작에 
온 힘을 기울이신 만봉 스님의 작품을 마주대하고 있으면 화려함과 
섬세함, 역동감 등의 기교적 차원을 뛰어넘어 붓끝에서 솟아난 강한 
필력이 느껴져 전율을 느낀다”며 “그래서 스님의 불화속에 팔만사천
법문이 그대로 담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극찬했다.
올해 들어서 만봉 스님은 특히 신선도를 많이 그렸다. 그래서 제자들로
부터 “우리 스님이 신선이 되시려고 그런가보다”는 농담반 진담반의 
말을 많이 들었다. 입적 소식을 들은 제자중 한 사람은 “아마도 스님이 
당신의 입적을 미리 예감한게 아닌가 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스님은 이제 부처님 곁으로 영원히 회향했다. 하지만 스님이 전국 각지 
사찰에 남겨놓은 단청과 불화들은 우리 불자들 가슴속에 영원한 법문으
로 살아숨쉴 것 같다.
 ▲ 주변에서 본 만봉 스님 
만봉 스님을 오래전부터 시봉해온 태고종단의 스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만봉 스님은 자상한 분이었고, 무슨일을 하건 공심이 많은 분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40년 이상을 곁에서 모셔온 前 봉원사 주지 인공 스님(태고종 종회의장)
은 “만봉 스님은 자신이 스승으로부터 배운 단청 기술을 사중과 불사를 
위해 쓰신 공심이 많은 분이셨다”며 “특히 봉원사 재정상태가 안좋아 
대웅전과 삼천불전을 짓고도 단청 불사를 하지 못해 전전 긍긍할때 만봉 
스님께서는 당신의 개인돈 1억원을 들여 불사를 해주셨다”고 회고했다.
0213 ▲ 마지막 작품 감로탱화?

만봉 스님을 입적하기전 마지막으로 친견한 봉원사 주지 환우 스님은 
“지난달에 만봉 스님의 후원으로 삼천불전 개금불사를 마쳐 5월 16일 
오후 만봉 스님께 결산 보고를 드리러 갔었다”며 “스님께서는 알아서 
잘했을텐데 번거롭게 뭐하러 왔느냐며 불화를 그리고 계셨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줄 몰랐다”고 말했다.
봉원사 부주지 선암 스님은 “스님은 평소 사진찍을때 소리가 나거나 
플래시 터트리는 걸 싫어하셔서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기 전인 95년 
이전 사진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고 안타까워 했다. 
제자인 김미혜 단청장 이수자는 “만봉 스님은 평소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 자상하고 따듯한 할아버지 같지만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눈빛이 
달라지고 작은 실수에도 엄하게 꾸짖곤 하셨다”며 “작업할 때에는 항상 
곰처럼 우직한 사람이 되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 만봉 스님 빈소 모습
5월 17일 새벽 0시10분 입적한 만봉 스님의 빈소가 신촌 봉원사 삼천
불전에 마련됐다. 첫 조문객인 태고종 총무원장 운산 스님을 비롯해 
종회의장 인공 스님, 봉원사 주지 환우 스님, 사회부장 법현 스님 등 
종단 부장급 이상 스님들을 시작으로 조문객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0214 ▲ 만봉 스님의 빈소에 운산 총무원장 스님이 분향하고있다.

운산 총무원장 스님은 “종단의 큰 주춧돌이 빠진 기분이다. 만봉 
큰 스님은 종단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 단청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하신 어른”이라며 “만봉 스님이 태고종단내 끼치신 
영향력을 고려해 삼원장급 이상을 지낸 스님들에게만 해당되는 
종단장 형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튿날에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방문해 눈길을 끌었다. 유 
청장은 “만봉 스님을 생전에 뵌적은 없었지만 인간문화재로서 
한국불교미술 발전에 크나큰 공적을 남기신 분이라는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며 “교수시절 문화재 연구를 하면서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스님의 단청을 많이 접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천태종 총무원장 정산 스님을 비롯한 종단협의회 소속 각 종단의 
수장들이 잇달아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 단청장과 불화장의 분리
만봉 스님은 1972년에 제정된 중요무형문화재 제 48호 단청장이었다. 
단청장은 목조건물에 채색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장인을 말한다. 현재 
단청장으로는 만봉 스님의 입적에 따라 홍점석씨가 있다.
원래는 불화가 석정 스님도 단청장 이었지만 문화재청이 지난해 11월 
4일 문화재위원회(무형문화재분과) 심의를 거쳐 ‘불화장(佛畵匠)''을 
중요무형문화재 제 118호로 별도로 지정함에 따라 단청장과 불화장이 
분리됐다. 그동안 단청장(丹靑匠, 1972년 지정) 보유자에 의해 전승
돼온 불화제작 기능을 단일종목으로 분리, 불화장(佛畵匠)으로 
지정한 것이다.
단청과 불화는 제작 목적과 표현방법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데, 
단청은 궁궐, 사찰, 사원 등의 건축물 벽면에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문양과 그림을 그려 만든다. 반면 불화는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회화적으로 표현하는 법회용, 포교용 탱화 제작을 주로 하고 있다. 
또한 현재 전승현장에서도 단청과 불화는 각각의 고유한 기술과 
역할을 바탕으로 분리 전승되고 있다. 불화는 불교 신앙의 내용을 
압축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불탑(佛塔), 불상(佛像) 등과 
함께 불교의 신앙 대상이 되며, 
그 제작 형태에 따라 탱화(幀畵), 경화(經畵), 벽화(壁畵) 등으로 
분류된다. 이 가운데서도 탱화는 복장식(服裝式), 점안식(點眼式) 
등의 신앙적 의식 절차를 거쳐 불단(佛壇)의 주요 신앙대상물로 
봉안된다.
우리나라 전통사찰에 전해오는 탱화는 불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불화제작에 종사하는 장인을 특별히 금어(金魚), 화승(畵僧), 
화사(畵師), 화원(畵員)이라 한다. 문화재청은 불화장을 별도로 지정
함에 따라 화원(畵員)으로서 그림을 기초 소양으로 하여 불교경전내용을 
도상화할 수 있는 기량과 함께 안료와 배접방법에서도 전통적인 제작방
법을 충실히 지켜가고 있는 장인을 불화장 보유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 만봉 스님의 제자는? 
예운 스님으로부터 단청을 사사한 만봉 스님이 그동안 배출한 제자는 
수백 명이 넘는다. 그 중에서도 1986년 전승공예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87년 단청장 보유자 후보(1995년 이후 전수교육조교로 통일)로 
지정된 박정자씨를 비롯해 전수교육조교 인섭 스님ㆍ양선희씨, 전수교육
조교이면서 제자들의 모임 벽연회를 끌고 있는 홍창원(벽연회 이사장)씨 
등이 있다. 
그 밑으로 이수자는 12명이 있는데 김창순, 이정아, 이세환, 김영범, 배정숙, 
김정순, 원미희, 최문정, 박애숙, 권선아, 나혜안, 김미혜 씨 등이다. 이수자 
아래에는 전수장학생 이형기, 박귀영, 양정민씨 등 3명이 있다

출처 : 흙에서흙으로 | 글쓴이 : 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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