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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scrap/사찰

[스크랩]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

by 천연 (오 자섭) 2011. 2. 9.
 전라북도 완주 송광사

0475 ▲ 대웅전 (보물 1243호)

0476 ▲ 대웅전 (보물 1243호)
대웅전에는 국내 최대 크기의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
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좌우에 목패, 천장에 주악비천도 11폭
이 장엄하게 조성되어 있다. 초창기에는 2층이었으나 1857년
도에 1층으로 중창되었다. 현판은 조선시대 서예가이며 선조
임금의 아들인 의창군 이광의 필체로 조각되었다.

0477 ▲ 대웅전 부처님 (보물 1274호)
국내 최대 크기의 소조 좌불로써, 부처님의 가호로 부국강병과 
나라의 안녕, 중국에 볼모로 끌려간 두분의 왕자가 무사귀환하
시기를 발원하기 위하여 조성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이
라고 불리는 진묵스님께서 점안하신 것으로 유명하며,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땀 흘리는 이적을 보이는 부처님이다.

0478 ▲ 亞자형 종각 (보물 1244호)
학(鶴)이 내려앉은 듯한 모습을 한 국내 유일의 아(亞)자형 종각
으로, 종을 중심으로 사방에 사물을 갖추었다. 부처님의 진신사
리를 모신 법당이나 보궁에만 올릴수 있는 아자 형태의 지붕을 
가지고 있다는 특징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종각을 찾고 있다. 

0479 ▲ 관음전
본 관음전은 2층 건물로서 1층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2층은 관음
전으로 각종 법회 및 학생들의 수련대회, 소규모의 세미나에 사용
되었으나 지금은 1층은 없어지고 2003년에 2층만을 옮겨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0480 ▲ 舊명부전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68호)
우리나라 4대 지장도량중 하나인 송광사는 지옥중생을 구제하겠
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시왕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끔 
지장보살상에서 빛을 발하는 이적이 나타나기도 한다.

0481 ▲ 나한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2호) 
석가모니 부처님과 두 분의 보살, 16 나한과 500 나한을 모신 법당
으로 정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끌기 위한 법당이다.

0482 ▲ 사천왕상 (보물 1255호)
국내의 사천왕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귀
중한 자료이다. 절대년도가 정확한 사천왕상은 이전의 사천왕과 
이후의 사천왕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중생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는지 살피고 인도하는 
사천왕은, 소조로 조성되어있으나 목조가 가지는 섬세함과 따뜻
함을 가지고 있다.

0483 ▲ 금강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73호) 
금강과 같은 단단한 지혜로 번뇌 망상을 제압하는 금강역사를 
모신 송광사의 두번째문이다.

0484 ▲ 일주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4호)
온갖 번뇌망상을 여의고 깨달음을 향한 일념으로 들어설 수 있는 
일주문은, 원래 남쪽으로 3㎞ 지점인 나드리에 있던 것으로 당시 
송광사의 사세를 알려주는 지표로 삼고 있다. 

0485 ▲ 목패 (전라북도 유형문화재170호)
왕실의 안녕을 발원하는 국내 최대의 목패 3위가 남아 있다. 
크기와 조각의 섬세함으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
된 목패다.

0486 ▲ 송광사 사적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5호)
송광사의 중창을 알리는 사적비는 인조14년에 사찰의 중창을 알수 
있게 하는 명문과 시주를 했던 당시의 인물들, 그리고 전설로만 알
려져 있던 진묵스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0487 ▲ 범종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38호)
1716년에 만들어진 범종은 전통 한국식을 따르고 있으며, 본래의 
소속 사원이 적혀있고 조성연대가 분명하여 조선시대 범종연구와 
前시대의 범종연구에 빠져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0488 ▲ 첨성각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천체를 연구하던 건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스님들의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0489 ▲ 주지스님 ★...참 소중한 인연입니다. 인터넷 송광사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감사들입니다.
이곳 종남산 송광사는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보조국사의 창건설화 가 남겨진 천년고찰입니다. 종남산과 위봉산을 배경으로 한 평지 가람으로서 절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과 조화를 이룬 가람배치는 찾는 이들에게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봄철에 방문하면 10 여리 진입로가 온통 분홍빛 벚꽃으로 장엄되어 별천지 에 온듯한 착각이 들게 합니다. 커다란 소조(塑造)부처님과 대웅전 천정에 그려진 비천상, 오백 의 나한을 모신 나한전, 그리고 국내 사찰로서는 유일하게 십자 각으로 조형된 종각, 사천왕 등의 중요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영험한 기도처로서도 유명합니다. 이같은 깨끗한 자연환경과 소중한 문화재를 직접 찾아오는 사람 하고만 함께 보다가 이렇게 인터넷으로 더 널리 더불어 함께 향 유하게 되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화엄경에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 (緣起)로 이루어진 인드라망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나와 이웃, 나와 자연, 나와 우주까지도 서로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궁극적 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렇듯 인터넷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으로 세계의 벽이 허물어지고 서로가 밀접한 관계 속의 존재임이 드러나고 있는 현재의 이 세상 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중무진의 연기, 인드라망의 세상 인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상으로 이곳 송광사를 방문해주신 여러분들도 이 같은 연기 의 진리를 깨닫고 인연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간직하시어 저마다 가 진 불성을 깨치는 계기로 만드시길 간곡히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불기2550(2006)년 7월 종남산 송광사 주지 금산 도 영 창건기 송광사는 신라 진평왕 5년(583)에 터를 잡았고, 경문왕 7년(867)에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 에 의해서 개창되었다. 그 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보조국사가 이곳을 지나다 大성지임을 아시고 표시를 해두고, 순 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본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 한지 어언 수백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임술)에 덕림 스 님을 중창주로 설두하여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복원·중창하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국난을 통해 전국토가 폐허가 되고 재정 이 고갈된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본사를 복원·중창한다는 생각 을 낸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보조국사의 뜻을 쫓아 덕림스님 등이 뜻 을 내었고 당대의 최고의 승려로서 국가의 절대적 신임과 수행, 학 덕을 갖춘 벽암각성대사를 大공덕화주로 파견하여 본사를 복원·중 창했다는 것은 이 사찰의 복원중창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적 결집 을 새로이 공고히 하는데 국가적으로도 대단히 간과할 수 없었기에 국가의 절대적 정책배려와 재정적 후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명나라에 볼모로 잡혀가신 소헌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본 국으로 돌아오실 것을 기원하고 국난으로 돌아가신 일체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했던 곳이기도하며 병자호란시 전주사고(왕조실록) 를 지키기 위하여 본사에 승군 700명을 배치하였던 곳으로서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또한 석가의 화현이라고 하신 진묵스님께서 1623년(계해년) 대웅전 삼존불 조성시 증명법사로 초청되었으나 부여무량사에서도 동시 초 청된 관계로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무량사에는 단주를 보내 법력을 나투시었는데 주장자가 밤낮으로 꼿꼿이서서 법상을 물리는 신의함 을 나투신 곳이기도 하다. 진묵스님께서는 이적을 많이 나투신 관계로 그저 신화적 존재로 인 식하고 있으나 초의선사가 제봉선사의 주선으로 편찬한 문헌외에는 족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이곳 송광사 개창비에 (大禪師 震○堂) 이 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진묵스님께서 많은 시간을 이곳에 주석하셨 음을 엿볼 수가 있다. 벽암각성대사도 본사 주지를 역임하시고 1660년(현종1년)에 이곳 에서 돌아가셨다. 그후로 전법초조인 도의국사의 뜻을 쫒아 선종대 가람사로서 많은 고승 대덕이 배출된 곳이다. 일주문이 현재의 위치로부터 3km 남쪽밖인 나드리(무주, 진안방면 도로 입구)라는 곳에 서있던 것을 1814년(순조14년) 조계교가 있던 곳에 옮겼다가 1944년 해방되기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이 절은 본래 白蓮寺(백련사)라 불리워 800동의 당우와 600승려들 이 살아 16방사가 즐비하여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 가 대단했다고 사료된다. 불조의 혜명을 받들어 1600년 한국불교를 새롭게 하고 열악한 전북 불교를 회생시키고 민족과 역사속에 앞장서기 위해서는 선종대가람 사 종남산 송광사의 새로운 조명과 절대적 중흥이 필요하다.
0490 ▲ 가람배치도 0491 ▲ 찾아오시는 길
배경음악 : 산사명상4 - 01 세월 출처 : 인터넷 송광사


출처 : 오동나무
글쓴이 : 오동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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